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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들

396m의 기다란 호기심, 쇼베 동굴에 접근하는 방식

by TNT007 2014. 3. 26.

내게도 쇼베 동굴 같은 타임캡슐이 있었으면 좋겠다.

잊고 싶은 기억은 모조리 동굴에 넣어 버리게.

그리고는 거대한 암석으로 입구를 막아버릴 것이다. 쇼베 동굴처럼.

396m나 되는 프랑스 남부 어느 협곡에서 발견된 이 동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동물은 뼈를 남기고 인간은 그림을 남긴다는 것,

그리고 고대 화가들의 솜씨가 결코 오늘날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일흔이 다 되가는 노장 베르너 헤어조크.

시를 읽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적절한 비유가 일품인 질문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눈앞의 황홀경.

이 삼박자로 인해 벽화와 동물의 뼈와 석회석들은 어느새 관객에게 말을 건다.

구석기인의 영이 깃든 목소리로.

문득 동굴 벽화는 과거 타다 만 장작으로 흰 벽에 낙서 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그림이 아니라 언니 욕을 잔뜩 썼었지 아마.

그 나이에도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이 놓인 환경이 부러웠다.

먼 훗날 칠순 잔치를 앞둔 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일들을 하며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이 다큐에서 흥미로운 점은 꿈의 동굴에 접근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방식이다.

서커스 단원 출신의 고고학자는 첨단의 과학으로 ‘스토리’를 상상했다.

과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에 대해. 그는 연구가 아니라 동굴이 들려줄 이야기에

이끌려 이곳에 온 것이었다.

또 아직 동굴 주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석실을 찾는 향수제조인.

그는 이력답게 동굴 주위를 배회하며 동굴의 냄새를 노렸다.

공기의 흐름으로 석실을 찾는 일반 기술이 아닌 후각을 이용한 개인 기술로 말이다.

그밖에도 당시 오리냐시앙 문화 사람들처럼 순록 털옷을 입고,

독수리 뼈로 만든 피리를 불어보였던 유머러스한 학자까지.

 

 

과연 쇼베 동굴이 한라산에서 발견되었더라도,

이런 유연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을까?

이 동굴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융합’을 보았다.

써커스 단원이 보는 동굴, 향수 제조업자가 보는 동굴,

화가가 보는 동굴의 관점은 각기 다를 것이다.

그들의 다양한 이력과 고고학이 융합되어 동굴이 베일을 벗고 있었다.

 다양하되,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관점은 그래서 소중하다. 왜냐고?

갑자기 우주에서 떨어진 동굴은 고고학적 지식이 아닌

고고학적 상상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이쯤에서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즉, ‘아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쩌면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바로 상상하는 자이기에.

*웹진 <랄라고고-창간 준비호>에 실림